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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 말로(末路)

토미더머니 2023. 2. 22.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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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路

1.

"아우님이 계신가, 원."

 

봉림(鳳琳)은 문간에서 부터 인기척을 내고 들어온다.

 

"언니, 이게 웬 일이요?"

 

봄날의 따듯한 볕을 받고 앉아서 바느질을 하던 순영은 반 색을 하여 일어나 맞는다.

 

"언제든지 바느질이야. 바느질 나자 아우님 났군."

 

"그럼 어떻게 하우? 굶어죽을 수는 없구."

 

순영은 웃는 입으로 한숨을 짓는다.

 

"늘 와서 놀다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마는 무얼 하는 지 나올 사이는 없구면, 먹구 사는 게 다 무엇인지. "

 

"에구, 그렇지요. 나는 혼자 살림이라도 나갈 틈이 없는데 언니야 그렇고, 어서 앉으세요."

 

순영은 손으로 마룻바닥을 쓸더니,

 

"방으로 들어갈까?"

 

하고 봉림을 쳐다본다.

 

"방에는 무얼, 예가 따듯하고 좋지."

 

봉림은 치맛자락을 덕어치고 앉으려고 한다.

 

"날이 따듯하니까 오히려 마루가 나아요, 방이라구 구랑신 같구."

 

순영은 손으로 쓴 자리를 다시 입으로 불더니,

 

"방석이 있나 돗자리가 있나, 그대로 앉으세요. 날마다 걸 레질을 치니까 그렇게 더럽지는 않아요."

 

하고 바느질하던 것을 치워 놓는다.

 

"신색은 그전보다 나아졌어."

 

봉림은 앉으면서 순영을 본다.

 

 

"나아지다니, 나아질 수가 있나요."

 

"아니야, 나아졌어."

 

"모르지, 나아졌는지 어쨌는디, 나는 거울도 안 보니까."

 

순영은 앞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올린다.

 

"거울을 안보니까 이뻐지나 봐, 거울을 보고 화장을 하고 좀 이쁘게 만들려면 어째 그렇게 점점 미워지는지 모르겠어. 나도 인제 거울도 보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고 그럴까 봐, 좀 이뻐지게, 호호호."

 

"언니는 본 바탕이 원체 이쁘니까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덜 이뻐질는지 모르지. 언니 같은 인물은 드물꺼야."

 

순영은 눈으로 웃는다.

 

"에구 이런, 한참 못 봤더니 말재주가 늘었어. 언니를 놀려 먹으면 죄로 간다나. 그런데 참 어떻게 지내요?"

 

봉림은 웃다가 얼굴빛을 고친다.

 

"어떻게라니? 그렁저렁 지내지, 죽지 않으니까 살지."

 

"아니,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것이지만, 마음은 다 안 정이 되었겠지, 애절도 해쌓더니."

 

"그전보다는 많이 잊어버린 셈이지마는 그래도 아주 잊어 버려지지를 아니해요."

 

"처음에 이혼을 당하고 수복이 죽고 나서는 애절도 하더니 그게 벌써 삼 년 인가?"

 

"햇수로는 사 년이지."

 

"아우님 울고 야단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 년이 되었구료. 세월은 참 무정한 것이거든. 그렇지. 사 년 아니 라 백 년이 되더라도 아주 잊어버릴 수가 있나."

 

"아주 잊어버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자꾸만 생 각이 나요,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언니?"

 

"약한 게 아니라, 마음이 인자해서 그렇지. 모자간 은정이 라는 것이 그런 것이거든."

 

"아니야, 수복이 생각도 생각이지마는 그것은 죽은 것이니 하릴없으나, 그이 생각이 그렇게 나요."

 

순영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여도 이상하다는 듯이 의심하 는 듯한 눈으로 봉림을 본다.

 

"그이라니? 수복이 아버지 생각이 난단 말이야?"

 

 

"그래, 언니."

 

"나는 수복이 생각을 그렇게 한다구, 그이야 생각할 턱이 무엇 있나."

 

하는 말을 화두(話頭)로 조금 멈추다가 말을 계속한다.

 

"어떻다구 그이를 생각하는 거야? 날 마다고 버리고 간 사 람을......"

 

봉림은 조소하듯이 말한다.

 

"싫어서 버리고 간 것은 아니거든."

 

"싫어서 버리고 간 것이 아니면 좋아서 두고 간 것인가?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야. 다른 여자하고 살기 위하 여 민적까지 갈라 가지고 갔으면 고만이지. 그것을 생각해 서 무얼 하는 거야. 아니, 나중에 와서 도루 산다는 말을 곧 이듣는 거야?"

 

"꼭 곧이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두 자꾸 잊혀지지 앉는 것을 어떻게 하우?"

 

"그래 대관절 사 년 동안에 몇 번이나 왔었나?"

 

"한 번도 안 왔지."

 

"그래, 그 풍파를 내서 수복이까지 죽게 만들어 놓고서 한 번도 안 왔다?"

 

"금광 하느라고 바빠서 올 새가 없는 게지.'

 

"그럼 편지 왕래는 있었는가?"

 

"편지도 없었지, 편지를 하려야 주소를 알아야 하지. "

 

"이런 부처님 반 토막 보았나, 아우님이 편지를 했느냐 말 이 아니라, 저편에서 편지 한 번도 안 했더냔 말이요."

 

"글세 없었어요."

 

"그래, 그럼 수복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구면?"

 

"모르겠지요, 알 수가 있나요."

 

"이를테면 수복이도 제 아버지가 죽인 것이 아닌가?"

 

 

"그거야 제 명이 짧아서 죽었지, 그랬다구 죽었겠어요."

 

"제 명이 짧아서 죽다니? 제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야단을 치니까 놀라서 경풍이 되어서 죽은 것이지, 그랬다 구 죽었겠느냐는 소리가 무슨 소리야, 원."

 

"그래두 제 명이고, 저래두 제 명이지, 어쩌겠소."

 

순영은 눈물을 씻는다.

 

"그래, 그러구 가서 사 년이 되도록 한 번도 오지도 아니하 고, 편지 한 장도 없는 그 사람을 믿고 기다린다?"

 

봉림은 눈물을 흘리고 앉았는 순영이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너무도 속이 없는 것 같아서 멸시하는 듯한 생각도 났다.

 

"나는 암만 해도 그이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말 것 같지 는 않아요. 그전에도 더러 이얘기 하였지만, 그이는 나를 살 려 준 은인이기도 하고 또 어쩐지 자꾸만 생각이 나요. 그 게 사람이 못나고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언니? 언니 같으 면 그런 사람은 생각도 않겠지?"

 

순영은 자기가 대철을 잊지 아니하고 생각하는 것이 허물 이나 되는 듯이 말한다.

 

"나 같으면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자가 와서 비지 발하고 한 번 보자구 한대도 보지도 않을 테야. 편지가 온 대도 포지도 않고 불에 넣어 버릴 테야. 그런 것을 사람이 라고, 생각이 다 뭐야."

 

봉림은 입을 삐죽하면서 고개를 조금 돌린다.

 

"그렇지, 언니 성미 같으면 그렇고 말고,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한지 모르겠어. 그래두 그이가 자꾸 불쌍 하기만 해요, 그리구 그이가 자꾸 믿어지고 사람이 설마 그 러랴 싶거든요. 지금이라도 돈만 있고 그이 있는 곳을 알면 돈을 보내주고 싶어요. 어째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이뿐 아 니라 누구든지 사람이 그렇게 잘못하랴 싶고, 또 불쌍한 사 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고 그래요. 그게 사람이 못나서 그 렇지, 언니?"

 

순영은 길 잃은 사람이 길을 묻듯이 진정으로 자기의 생각 이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여서 묻는다.

 

"못나기야 왜 못나, 그게 좋은 마음이고 착한 생각이지. 남 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싶은 마음이 여북이나 좋은 생각 인가? 하지만 믿어서 서용이 없는 사람을 믿기만 하는 것은 도리어 어리석은 일이거든, 하니까 말이지 못나기야 왜 못나?" 봉림은 순영의 말에 느낀 바가 있는 듯이 태도를 고치더 니,

 

"그런데 참,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딴소리만 하고 있 었네."

 

하고 순영을 본다.

 

 

"무슨 말이에요? 인제 참 그런 말은 고만두고 다른 말이나 해요."

 

순영은 봉림이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새로운 기대를 가진다. "그런데 그런 일도 있을까?"

 

봉림은 순영의 편으로 다가 앉는다.

 

"무슨 일?"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수는 없겠지?"

 

"무슨 말이요?"

 

순영은 더욱 듣고 싶어한다.

 

"내가 아마 잘못 보았나 봐."

 

"아 , 글세 무슨 말이야?"

 

"사람의 일이 밤새 문안이라고 하지만, 사 년 동안에 아무 렇기로 그렇게 될 리야 있다구."

 

"아이 참 언니두, 말은 아니구 사람의 간장만 녹이려 드네." 순영은 논을 흘기는 듯이 웃는다.

 

"하두 이상해서 내가 잘못 보았나 어쨌나, 말하기가 어려워 서 이러구 있어요, 글세."

 

"아이, 하늘에 가 별이나 따는 소리가 나올라나 부다. 이렇 게 허두가 긴 것을 보니."

 

순영은 도리어 긴장한 빛을 잃은 듯하다.

 

"그런데 사람이 사 년 동안에 부자가 거지도 되고, 거지가 부자도 되고 그러는 수가 있겠지, 아우님?"

 

" 사 년은 그만두고 일 년 동안이라도 그렇게 될 수가 있 겠지."

 

"그는 그래. 그래도 하도 이상하고 의심나서 말하기가 어려워. 하지만 기왕 말을 내었으니 본 대로 말을 하지. 하지만 암만해도 내가 잘못 보았을 거야. 잘못 보는 수도 있고, 또 같은 사람도 많이 있거든."

 

봉림은 눈을 순영의 눈과 마주쳤다 돌렸다 몇 번을 하더 니,

 

"아우님, 저 해태 앞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사직공원 쪽으로 가는 길이 안 있소 왜?"

 

"내 자동 쪽으로 가는 길 말인가?"

 

 

"그래, 그 길 말이야."

 

"그래, 그런데?"

 

"그길로 들어서려면 첫머리에 양옥집처럼 지은 집이 있지 않우?"

 

"그런 집이 있던가, 아마 있나 봐."

 

"그래, 그런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바루 아편장이들에게 아 편을 파는 집이거든. "

 

"아편을 팔아? 아편은 팔면 잡아 간다는데."

 

"그런데 이것은 가만히 파는 데가 아니라 인가를 맡아 가 지고 파는 데레. 그리고 거기 가서 아편을 사는 데도 인가 를 맡아야 한다나. 하여간 그 속내는 자세히 몰라도 아편을 파는 데라야."

 

"모르지, 나는 멍텅구리라 그런 것을 아나."

 

"그런데 내가 큰동서네 집에를 다니느라고 그 길로 차주 다니거든."

 

"그런데, 다니는데?"

 

"그런데, 언젠가 저번에 바루 비 오고 들던 그날이야.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말이야."

 

"에구, 대답하기도 귀찮아, 어서 말을 해요."

 

순영은 웃으면서 화를 내는 체한다.

 

"암만 해도 내가 잘못 보았나 봐."

 

"에구, 그만 두어, 듣기 싫어. 나는 듣지도 않을 테야."

 

순영은 기지개를 켜면서 뒤로 드러눕는 자세를 취한다.

 

"아니야, 이것은 내게는 손톱만큼도 상관 없는 말이야. 아 우님에게 관계가 있는 말이지, 관계라도 여간 큰 관계가 아 니거든. "

 

봉림은 말을 아니하여도 관계가 없다는 듯이 두손을 뒤로 짚고 버듬하게 앉는다.

 

"무슨 말이기에 내게 큰 관계가 있어, 어서 말을 해요."

 

순영은 다시정신을 차린다.

 

 

"우리 같으면 들어야 고만, 안 들어야 고만이지만, 아우님 은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2.

봉님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런데, 나는 거기를 지날 때에는 눈을 감고 싶어하고 다 녀요, 왜 그러냐 하면, 거기는 언제든지 아편장이들이 들썩 거리거든. 아편인지 모르핀인지 사가느라고 그래. 그것들이 보기 싫어서, 우리는 어째 그런지 아편장이가 그리 보기 싫 어 아우님은 그렇지 안아?"

 

"왜 안 보기 싫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볼 때에도 불쌍한 생각이 먼저 나요."

 

"인제 보니 아우님은 정말 부처님이 다 되었구료. 이 다음 에 극락이나 천당은 떼어놓은 당상이요. 우리는 다른 거지 보다 아편장이 거지가 제일 미워. 그래서 동냥아치가 와도 아편장인 줄만 알면 밥 한술 돈 한푼 안 주지. 멀쩡한 것들 이 아편을 처먹다가 그 묘양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까닭이 없는 사람이라도 곧 죽이고 싶어요. 글세, 아편장이 가 인에 몰리면 계집도 팔아먹는다는데,"

 

봉림은 눈을 치뜨고 순영을 본다.

 

"참 그런데, 하지만 그것도 인명이 아니요? 그 지경이 되면 불쌍하기야 하지, 그런데 말씀이나 하세요."

 

"그래도 나는 그것들이 보기 싫어서 거기를 지나려면 눈을 감다시피 하고 다녀오우. 한데 그날은 막 그 앞을 지날 때 에 문여는 소리가 삐드득하고 나기에 엉겁결에 흘깃 보니 까, 그 안에 아편장이들이 쭈욱 늘어 앉았단 말이야, 나는 아편 장이가 둘락날락하기에 누군지 들어가서 이내 아편을 사가지고 가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편장이들 모이면 호명을 하여 가지고 차례로 늘어 앉았지. 그런데 흘 깃 보니까 아이구 사람이 기가 차혀서."

 

봉림은 말을 멈추고 순영을 본다.

 

"무엇이 기가 막혀?"

 

순영은 어리둥절하여 아무 표정이 없는 눈으로 봉림을 본다. "글세, 이것 봐요, 기가 막히겠나 안 막히겠나, 흘깃 보니 까 그 중에 수복 아버지가 앉았겠지."

 

"수복 아버지가?' 순영은 황급하게 놀란다.

 

"그래."

 

봉림은 입을 벌리고 혀 끝을 조금 내민 채로 순영의 기색 을 살핀다.

 

"아니, 아편장이 속에 있어? 거기서 사무 보는 사람으로 있어?" "사무 보는 사람이 뭐야, 아편장이 속에 끼여 있더라니까."

 

 

"주제라든지 모양은 어떻게 되었어?"

 

"주제나 모양은 말해서 뭘하게, 헌 누더기를 용문산(龍問 山)의 안개 두르듯 하고, 얼굴은 바짝 말라 황달들린 저처럼 누룽퉁퉁한 것이 콧물을 찌르르 흘리고 형편 없지. 말해 서 뭘해. 왜 얻어 먹으러 다니는 아편장이를 못 봤어?"

 

"..........."

 

"똑 그렇지 다를까."

 

봉림은 신이 나는 듯이 말하는데, 순영은 가슴이 놀라여 얼굴빛이 흐려진다.

 

"그래, 어쨌어요?"

 

순영의 말소리는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품이 나다난다.

 

"어쩌기는 무얼 어째. 그래 나도 처음에는 잘 못 알아 보았 어요. 볼 때에 낯이 익은 듯하기에 가면서 곰곰 생각하니 그이란 말이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눈여겨 보지 않았겠나 봐. 별꼴을 다 보았어. 아편장이라면 눈을 감고 다 니던 사람이 그이 때문에 아편장이 설피했어. 그래 그 다음 부터 눈여겨 보자 하니까 가끔 그이가 눈에 띈단 말이야.

 

그래 아무리 보아도 수복이 아버지거든. 더욱 확실한 것은 한 번은 그이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꽉 수그리고 도망질을 하겠지, 그러면 무얼 하는지."

 

봉림은 말을 멈추다가,

 

"그렇지만 세상에는 같은 사람도 많으니까 모르지. 하지만 그이가 그새에 그렇게 되었을라구. 그렇잖아 아우님?"

 

하고 기운을 낮춘다.

 

순영은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어서 한 참 있다가,

 

"같은 사람도 있기야 하겠어요. 하지만 언니가 여북이나 똑 똑히 보았을라구."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는 듯이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힘없이 말한다.

 

"아무리 똑똑히 보아서 잘못 보는 수가 있거든. 내가 공연 히 그런소리를 했나 봐. 아우님 속만 상하게."

 

봉림은 자리를 고쳐 앉는다.

 

"에구, 사람이 어찌면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새로 근심을 간직하는 순영의 눈은 눈물이 엉긴다.

 

"아니야, 자세히 모르는 일을 가지고 걱정할 것이 아니야.

 

그리고 아주 남이 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해두 관계찮을 줄 알았지, 누가 저렇게 생각할 줄이야 알았나. 고만둬, 내가 잘못 보았나 봐."

 

봉림은 순영을 위로한다.

 

"아니야 그이가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어째서! 짐작하는 일이 있어."

 

"언니가 그런 말씀을 하니 나도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응, 무슨 일?"

 

봉림은 흥미를 가지고 다가 앉는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누가 그렇게 되었으리라고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그랬더니 아마 그렇게 된 거로군요."

 

"응,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야.""

 

순영은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는 듯이,

 

"날도 안 잊어버려요. 바루 지난달 보름날이야. 그때도 바 느질을 하고 앉았는데, 밖에서 누가 동냥을 달라고 하는데 첫 마디는 못 알아듣고 두 마디째 들으니.<돈 한푼 주시오>

 

하는 소기가 수복이 아버지 목소리 비슷하단 밀이에요. 목 소리가 조금 쉰 듯하기는해두 천연 그이 목소리 같단 밀이 에요. 그대로 심상히 알고서 동냥은 못 주었지요. 동냥 줄 것이 있나요 어디. 그랬는데 이웃집에 가서 동냥을 달라고 하는데 목소리가 또 그렇단 말이지. 그래 이상하게는 여겼 으나 그러고 말았지."

 

"그래, 그래서 어쩌면 그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봉림은 순영의 말 줄동을 질러 가지고 나선다.

 

"그랬는데 일 주일인가 지나서 바로 삼월 스무이튿날이야.

 

 

또 와서 동냥을 달라는데 또 그 목소리겠지. 그래 돈이 없 다고 그대로 보내고서 하도 미심스럽기에 가만히 나가서 가 는 것을 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얼굴은 자세히 알수가 없 으나 뒷모습은 천연하단 밀이에요. 방에 들어와서 곰곰이 생각하니 그 이가 그렇게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이 안 나나, 그래도 의심이 나서 이 다음에 또 오거든 동냥을 주 면서 보리라 하고 별러서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랬더니 그 러니까 삼월 그믐앟리수면, 또 왔겠지요. 그래 돈 일 전을 가지고 나갔지요. 일부러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그랬더니 대문간에 거의 나가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이 나갈수가 있어야지요."

 

"아니, 왜 그렇게 떨려? 공연히 그래?"

 

봉림은 바쁜 듯이 묻는다.

 

"모르지. 왜 그런지 공연히 그래진단 말이에요. 똑 무슨 호 랑이나 만난 것 같아요. 그래 그이가 나를 몰라 봐서 가만 히 돌아서서 들어와서는 동냥이 없다는 소리도 못하고 가만 히 있었지요. 자꾸 떨기만하고. 그랬더니 동냥을 달라구 소 리를 지르다 못해서 저절로 가겠지요."

 

순영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얼굴은 서로 봤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나요. 대문턱에 나가려다가 떨려서 두 루 들어 왔다니깐요."

 

"그러면 그이가 아우님 집인 줄 모르고서 왔을까?"

 

"알기를 어떻게 알아요. 그전에 살던 집 같으면 모르지만, 이사를 세 번이나 하고 문패가 있나 뭐 있나, 어떻게 알수 가 있나요?"

 

"그러니 그렇게 거지가 되어서 동냥을 달라고 하다가 동냥 을 가지고 나가서 둘이 딱 마주치면 어떻구, 아마 기가 막 히렸다. "

 

"에구, 그러기에 말이야. 딱 마주치면 그이보다 내가 더할 것 같아요. 그러기에 처음에는 보았으면 하고 돈을 가지고 나가다가, 딱 마주치게 될 만하니까 가슴이 내려앉고 몸이 떨려지는 게지. 그러니 딱 마주쳤으면 어떻게 될 뻔 하였어요?" 순영은 아직도 아슬아슬한 듯이 담을 쥐고 말았다.

 

"그러면 그게 분명한 수복이 아버진 게지. 나두 그렇게 보 고 아우님도 그렇게 보았으니, 둘이 다 잘못 보았을 리야 있다구?"

 

"글세요? 그렇지만 그이가 그렇게 되었었을 리야 있다구요? 나는 목소리만 듣고 뒷모습만 보았으니까 얼굴은 똑똑 히 모르지요. 그런데 만일 그이가 그렇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우."

 

순영의 얼굴빛은 다시 흐린다.

 

 

"어떻게 하긴 무얼 어떻게 해. 인제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 래, 딴 남이 되었는데, 그전에 살던 정리(情鯉)로 조금 안됐 기는 하였을까, 하지만 우리 같으면 그렇게 된 것이 도리어 고소할 것 같아. 자기에게 원혜를 끼친 아내를 아무 연고 없이 생나무 꺾듯이 잡아 떼고서 다른 계집하고 사는 그런 인종은 앙화를 받아야 싸지, 천도가 무심치 않아서 그렇게 된거에요. 그까짓 것을 불쌍히 생각하면 무얼 하우. 이 다음 에 오거든 나가서 날 버리고 가더니 요 모양이 되었느냐구 얼굴에다 침이나 뱉구 마우."

 

봉림은 신이 나는 듯이 말한다.

 

"에구, 언니두, 사람이 차마 어떻게 그렇게 하우?"

 

순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할 테야? 도로 데리고 살 테야?"

 

"데리고 살지는 않더라도......"

 

"데리고 살지는 않더라고 어떻게 한단 말이야? 아랫목에 모셔 놓고 신주 위하듯 위할 테야?"

 

"에구 언니두."

 

"그런 소리는 말아요. 당장에 디리고 사는 남편이라도 그 지경이 되면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데, 벌써 이혼한 사내를 어떻다는 말이야. 아편 중독이라는 것은 막 가는 일이에요.

 

그것은 고치지도 못하고 사형 선고를 등에다 붙이고 다니는 것이라, 어느 때에 죽을는지 모르는 것이요. 목숨이 붙어 있 다니 오죽한다. 그야 말로 산 송장이지. 만일 그 사람을 아 는 체 했다가는 큰일 나지. 그 사람과 같이 되고 말 것인데, 아예 그 사람을 아는 체할 생각은 말아요. 다른 사람 같으 면 이러니 저러니 할 것이 없지만, 아우님이니까 친동생과 다름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에요. 아우님의 인자한 마 음으로 이런 것 저런 것 생각지 아니하고 또 그 사람을 아 는 체할는 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러면 둘의 신세를 다 망 치고 마는 것이에요. 그리고 보통 사람같이 죽이면 죽, 밥이 면 밥, 가만히 먹고만 있으면 오히려 모르지만, 이건 밤낮 먹을 것만 찾고 인에 몰려서 제때가 되면 곧 죽는대요. 그 래 무슨 짓이라도 하여서 아편을 먹든지 침이라도 맞아야 한다니, 그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 말이요. 생각만 해도 소름 이 끼치는 일이지 안 그러우?"

 

봉림은 친절한 태도로 말한다.

 

"아편에 인이 박이면 그렇대요. 어쩌면 사람이 그 모양이 될까."

 

순영은 간단히 말을 하고 한숨을 쉰다.

 

"아우님이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고 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구 사람에게 대한 생각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지?"

 

 

봉림은 반만 웃으면서 순영을 들여다 본다.

 

"그럼 어떻게 하우, 자꾸 불쌍한 생각만 나는데."

 

순영은 눈물이 글썽거린다.

 

"아우님, 그러지 말고 생각을 돌려요.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깨어진 시루를 생각하면 무얼 한담. "

 

"할 말이 무슨 말씀이에요?"

 

순영은 새로운 정신으로 묻는다.

 

"할 말이 있지마는 아우님이 생각을 돌리지 아니하면 소용 이 없는 말이거든. "

 

"글세 무슨 말씀이에요?"

 

"말을 해야 아우님에게 이(利) 되는 말이지 해 되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듣지 않을 테면 말을 않는 것이 옳지. "

 

"말을 해봐야 알지, 들을지 안 들을지 어떻게 아우?"

 

"이건 그렇게 할 말은 아니야. 듣는다면 하구 안 듣는다면 입밖에 낼 소리가 아니거든. "

 

"글세, 말을 해 봐요."

 

"말을 하면 들을 테야?"

 

봉림은 의심스런 눈으로 웃는다.

 

"내가 이 되는 말이면 듣지."

 

순영도 웃는 모양을 짓는다.

 

"그럼 이로운 말이지 해로운 말일까?"

 

"글세 해봐요."

 

"정말 들을 테야?"

 

"정말 들을 테야, 이 되는 소리를 안 들을까 뭐."

 

"정말 듣는다고 그랬것다?"

 

 

"글세 들어요."

 

"그런데......"

 

하고 봉림은 얼굴빛을 고치고 진정한 표정으로.

 

"아까 그 사람은 그렇게 되었은즉 여망이 없는 사람이거든.

 

그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고 금광을 잘하고 있다면 또 몰 라, 그 사람 말마따나 돈이 많이 생기면 도루 와서 같이 살 는지. 하지만 그런대도 확실히 와서 같이 살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사람이 저 지경이 된 바에야 터럭 끝만큼이나 다른 여망이 있을 수가 있나, 안 그러우?"

 

"사람이 그렇게 되었으면 무슨 여망이 있어?"

 

순영은 한숨을 쉬려다가 멈춘다.

 

"그러니 말이야, 그러면 아우님은 무엇을 바라고 사느냐 말 이야. 남편이 있나 자식이 있나, 무얼 바라고 사느냔 말이지." "바라기야 무얼 바라, 죽을 때나 바라지.'

 

"그러니 말이야. 그럴 필요가 없거든, 공연히 일생을 고생 으로 지낼 필요가 무엇이냐 말이야. 그것도 사람이 이만저 만하여서 잡힐 손이나 없는 것 같으면 모르지. 고생을 면하 려야 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우님 같은 이야 백모로 보아도 고생할 자격이 아니거든 하니까 여러 말 할 것이 팔 자를 고치면 어떻까?"

 

봉림은 용기를 내는 듯이 힘있게 말한다.

 

"팔자를 고치다니요?"

 

순영은 누을 조금 크게 뜨고 봉림을 본다.

 

"팔자를 고친다는 말을 못 알아들어? 그렇게 고생하지 말 고 마땅한 데 가라는 말이지."

 

"다른 데로 시집을 가란 말이야?"

 

"그래, 시집을 가면 어때. 지금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 사 람이 상당한 서방을 두고 다시 시집을 가는 것은 못쓰지만, 이혼한 바에야 시집을 열 번인들 못 가랴. 내가 띄어놓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마땅한 곳에 지수(指手)할 데가 있어서 말을 하는 게지. 생각해서 하라구, 그런일은 강원할 수 는 없으니까."

 

봉림은 기운을 눅인다.

 

"차차 생각을 해봐서."

 

 

순영도 간단한 말로 그 자리는 가리었다.

 

3.

순영은 마음이 어지러우며 여간 궁금하지 아니하였다. 동 냥 다니는 사람이 대철이 같은 것을 본 뒤로는 의심을 풀지 못하여 그 정체를 알아보려고 하던 중에, 봉림의 말을 들으 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도 하나,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 도 대철이 그 사이에 그렇게 까지 되었을 리는 만무하고, 봉림의 말을 꼭 곧이듣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순영은 그 사람이 다시 오기를 기다려서 자세히 알아보려 하였으나 이삼 일이 지나도 오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조급 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봉림이 말하던 아편을 판다는 곳 을 가보기로 하였다. 순영은 그 사람을 만나보러 가면서도 자기만이 그 사람을 보고 자기는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 려고 주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얼싸 가려서 누가 보든지 자기인 줄을 모르도록 하고서도 오히려 고개를 숙이었다. 그러나 헐벗은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가 슴이 두근거리고, 거지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예사로 보이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바로 아편을 판다는 그 집 문앞 으로 가지 못하고 그 반대 방면인 중학동(中學洞) 어귀의 한 편에 가 서서 거의 눈만 내놓고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내왕은 많았으나 아편장이라고 볼 만한 사람 은 볼 수가 없었고, 거지 같은 사람도 있기는 있었으나 그 집으로 드나드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봉 림이 말하던 곳이 그곳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으나, 한편 으로는 봉림의 말이 것짓말이나 아닌가 하고도 생각되었다.

 

순영은 한 군데에 너무 오래 섰는 것이 남보기에 이상스러 울 듯하여서, 조금 씩 자리를 비켜 가면서 거의 한 시간 동 안이나 기다리다가, 저녁 때가 되어 감에 공연히 화를 내면 서 돌아서서 오다가, 물어나 보고 갈 양으로 도로 섰던 데 로 나갔다. 그러나 물어 볼 곳이 만만치 아니하였다. 의관한 사람이 나 순사를 보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또 여러 사람 이 있는 곳에서 물을 용기도 없었다 그러자 큰 길 한 편에 구르마를 의지하여서 졸고 있는 늙수그레한 영감이 있어었다. 그 근방은 다른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여보세요?"

 

순영은 그 소리조차 떨리는듯 하였다.

 

"......"

 

졸고 있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묻겠어요."

 

순영의 말소리는 조금 컸다.

 

"응."

 

하고 눈을 뜨는 그 손등으로 수염에 흘러내린 침을 씻으면 서 순영을 보더니,

 

 

"에이 피곤하기두,"

 

하면서 바로 앉는다.

 

"이거 보세요, 말씀 좀 묻겠어요."

 

"무슨 말씀이요?"

 

그 사람은 곤한 잠을 깨운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대답하 는 말이 무뚝뚝하다.

 

"저기 저게 무슨 집이에요?"

 

순영은 아편 판다는 집을 가리친다.

 

"어떤 집이요?"

 

"저기 저 집 말이요. 저기는 내자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 지요. 그 질 들어가는 첫 버리 남쪽으로 양옥집처럼 지은 저 집 말이에요."

 

"예 그 집이요? 그 집은 왜 묻소?"

 

하고 순영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아니 글세요."

 

순영은 얼굴이 화끈하여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집이 아편 파는 집이라우, 왜 아편 사실라우?"

 

"아니오, 그 집에 아편장이들이 많이 드나든다고 하기에 말 이애요."

 

"아편장이가 많이 드나들고말고요, 그게 아편장이 도회청이 라우. 왜 아편장이를 만날 사람이있소?"

 

"아니요, 글세 말이에요, 그럼 아편장이들이 저 속에 있나요?" "아니오, 아침 나절이 되면 보두 와서 아편을 사가지고 가 지요, 거기 있기는 왜?"

 

"그럼 아침 나절에만 오는 구요?"

 

순영은 아편장이를 볼 수 없는 이유가 저녁 때가 되어서 그러한 줄을 알아았다.

 

"그렇소, 그건 왜 그렇게 자세히 묻소 보아하니 침 받는 이 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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