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11

한용운 - 유혹(誘惑)

誘惑 1. 굽이치고 휘돌아서 길이 오백여 리를 흐르는 동안에 농사 짓는 물로서는 많은 이익을 주며, 마침내 대경성(大京腥)의 칠십만 인구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고, 배와 떼를 운전하여서 모든 물화의 운수의 편의를 주면서 낮과 밤으로 흐르고 흘 러서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한강(漢江)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한 한강 근원의 한 가닥인 설악산(雪嶽山) 물은, 그 한 잔에 지나지 못하는 첫 근원이 그 산의 제일 상봉인 청봉 (靑峰) 밑에 있는 봉정암(鳳頂庵)의 근처에서 나서, 이조 단 종(端宗) 때의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매 월 당 김 시습(梅月堂金時習)이 산에 올라 울고 물에 임하여 울다가 마침내 중이 되어서 부처님에게 귀의하던 오세암(五 歲庵) 밑으로, 또는 김삼연(金三淵)의 끼친 자취로 이..

정보 2023.02.22

한용운 - 죽음 (1924년)

1 『탕!』 하는 폭발탄 터지는 소리는 경성의 복잡하고 산만한 공기 를 울려서 천이면 천 사람, 만이면 만 사람의 다 각기 다른 여러 가지의 마음을 비교적 단순하게 통일을 시켰다. 이것은 계해년 팔월 스무 아흐렛날 오전 열한시, 곧 한일 합방 기념일의 일이었다. 폭탄 소리는 어느 나라와 어느 때 에라도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두려운 인상을 주는 것이다. 하물며 특수한 사정을 가지고 이상한 조선 사람, 그중에도 도회지인 경성에 있어서 신경이 더욱 발달되고 사정이 더욱 복잡한 여러 사람의 마음은 평화롭지 못한 폭탄 소리를 듣 고 이상한 자극을 받아서 절반은 의심하고 절반은 믿는 것 같은 방면으로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다른 의심과 특별한 무서움을 가지고 거친 들의 미친 바람에 흔들리는 외로운 꽃처럼 ..

정보 2023.02.22

한용운 - 조선 청년에게

새해를 맞이하면서 조선 청년에게 몇 마디 말을 부치게 되는 것도 한때의 기회라면 기회다. 그러는 말을 많이 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할 말이 하도 많아서 이루 다 할 수가 없을 것 같더니 글을 쓰려고 붓을 들고 보니 다시 말이 없자 한다. 그래서 나의 말은 거칠고 자르다. 여기에서 특별한 의미(意味)를 찾으려는 것보다 한 줄기의 정곡(正鵠)으로 알려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讀者) 여러분은 거친 말을 다듬어 읽고, 짧은 글을 길게 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상승(上昇)이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괴로운 형식(形式)으로 표현(表現)되는 거친 말과 짧은 글을 독자의 가슴의 깊은 속으로부터 다듬어 보고 길게 읽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고통(苦痛)이 되..

정보 2023.02.22

한용운 - 이혼(離婚)

離婚 1. 순영이 결혼 생활을 한 지도 어느 사이에 오 년이었다. "엄마, 과자."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바느질하는 순영의 곁에서 보챈다. "응 과자 사주지, 이따가 사줄게 응." "싫어, 나 과자." "응 과자 주지, 지금은 돈이 없어 이 바느질을 해 가지고 가서 돈을 받아와야 과자를 사주지. 얼른 해 가지고 가서 돈을 받아 가지고 올게 가만히 있어, 응." 순영은 어린아이 머리를 쓸어 준다. "엄마, 나 때때." "암, 때때두 해주지, 인제 열한 밤만 자면 설이다. 설 때에 때때 해주지." "열한 밤?" "응, 열한 밤만 코 자면 설날이야. 때때 입고 세배하면 절 값 주지." "하나 둘 셋 열." 하고 손가락을 되는 대로 꼽았다 폈다 하면서 순영의 무릎 을 베고 드러눕는다. "너 참 성이 뭐야?" ..

정보 2023.02.22

한용운 - 철혈미인 (1937년, 미완)

戰爭 1. 서력(西曆) 一九三五년 二월 一三일 하오 三시에 천진남마 로(天津南馬路)에 있는 불교거사림(佛敎居士林)에서 중국 군 벌의 거두 손 전방(孫傳旁)의 암살 사건이 있었는데 그 범인 은 당년 三0세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약한 자여 너의 이 름은 여자니라」는 별명을 드드는 섬약한 여자 중의 한 사 람인 시 곡란(施谷蘭)이 듣기만 하여도 무시무시한 군벌의 거두요 백전 노장(百戰老將)인 손 전방을 암살한 원인을 자 세히 알려면 말로 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화민국 一四년이었다. 중국의 혁명은 완성되지 못하고 중벌들은 각각 자기의 세력을 붙들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할 뿐이요, 국가와 민생은 안중에도 두지 아니하므로 중 국 四억의 민중은 거의 어육이 되는 판이었다. 당시 절강군사 선후독판(浙江軍事..

정보 2023.02.22

한용운 - 색주가(色酒家)

色酒家 1. 옳다 그르다, 기쁘다 괴롭다 하는 속에서, 바람 불고 비 오 고, 차고 덥고 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인생으로서 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순영도 그러하였다. 순영이 사숙에 다니면서 가무를 배운 지도 어느덧 이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가무나 풍류를 옳게 다 배우는 것은 아니지마는 다른 아이들에게 비하여 성적이 우월하였고, 또는 나이 열여섯이 된지라 신 체도 상당히 발육되어서, 처녀로서 피어나는 때에 으레 있 는 아름다운 구석이 곳곳에 보였다. 측량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일이라 하지마는, 아직도 천사 같은 순영이, 그 몸은 재 수사망을 빌기 위하여 고사지내는 아귀도(餓鬼道)의 제단(祭 壇)으로 이바지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만한 무슨 전생의 업 원(業?)이 있었든지 없었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얘..

정보 2023.02.22

한용운 - 말로(末路)

末路 1. "아우님이 계신가, 원." 봉림(鳳琳)은 문간에서 부터 인기척을 내고 들어온다. "언니, 이게 웬 일이요?" 봄날의 따듯한 볕을 받고 앉아서 바느질을 하던 순영은 반 색을 하여 일어나 맞는다. "언제든지 바느질이야. 바느질 나자 아우님 났군." "그럼 어떻게 하우? 굶어죽을 수는 없구." 순영은 웃는 입으로 한숨을 짓는다. "늘 와서 놀다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마는 무얼 하는 지 나올 사이는 없구면, 먹구 사는 게 다 무엇인지. " "에구, 그렇지요. 나는 혼자 살림이라도 나갈 틈이 없는데 언니야 그렇고, 어서 앉으세요." 순영은 손으로 마룻바닥을 쓸더니, "방으로 들어갈까?" 하고 봉림을 쳐다본다. "방에는 무얼, 예가 따듯하고 좋지." 봉림은 치맛자락을 덕어치고 앉으려고 한다. "날이 ..

정보 2023.02.22

한용운 - 후해 (1936년, 미완)

1 어젯밤에 개인 적은 비는 다시금 가을빛을 새롭게 하였다. 나비의 꿈인 듯한 코스모스의 가볍고 깨끗한 모양이 아침 볕에 새로운 키스를 이기지 못하여, 온몸을 움직이고 있는 한편에 처음 핀 국화의 송이송이에 맺혀 있는 이슬 방울이, 바로 보면 은(銀)인 듯하다가 비껴 보면 금인 듯도 하였으 나, 맑은 바람이 지나간 뒤에 다시 보면 그것은 은도 아니 오 금도 아니오 이상한 수정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마음도 없이 가을 향기를 맡으면서 문지 도리를 의지하고 고요히 서 있는 스무 살이 될락말락한 예 쁜 여자는 잊었던 일을 깨우친 듯이 빠르면서도 한가하게 몸을 돌리면서, 갓 마친 단장을 거울에 비춰서 가볍게 두어 번 손질한 뒤에, 삼층장 위에 놓여 있는 바느질 그릇을 내 려놓고 다시 장문을 열고 무엇인지 꺼내려..

정보 2023.02.22

한용운 - 결혼(結婚)

結婚 1.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 그날 그날을 보내는 순영도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었다. 봄이 순영에게로 왔는지 순영에게서 봄이 생겼는지 모르나, 순영은 정수박이에서 발꿈치까지가 봄이었다. 육체도 봄이라면 정신도 봄이었다. 살에서 피어나 는 냄새가 봄의 향기라면, 감정에서 솟아나는 공상은 봄의 꿈이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이성(異性)을 그려도 보고, 오지 않는 행복을 손가락에 찍어서 맛보려고도 하였다. 일기가 청명하면서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숙자의 집에서 는 술 파는 계집애들을 한 달에 두 번씩 대거리로 놀리는 정기일(定期日)이 있는데, 그날은 마침 순영이 놀게 되는 날 이었다. 순영은 그날을 이용하여 월미도의 조탕(潮湯)에 가 서 해수욕을 하기로 하였다. 순영은 일찍부터 서둘렀다. 손 님들에게서 얻..

정보 2023.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