誘惑
1.
굽이치고 휘돌아서 길이 오백여 리를 흐르는 동안에 농사 짓는 물로서는 많은 이익을 주며, 마침내 대경성(大京腥)의 칠십만 인구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고, 배와 떼를 운전하여서 모든 물화의 운수의 편의를 주면서 낮과 밤으로 흐르고 흘 러서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한강(漢江)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한 한강 근원의 한 가닥인 설악산(雪嶽山) 물은, 그 한 잔에 지나지 못하는 첫 근원이 그 산의 제일 상봉인 청봉 (靑峰) 밑에 있는 봉정암(鳳頂庵)의 근처에서 나서, 이조 단 종(端宗) 때의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매 월 당 김 시습(梅月堂金時習)이 산에 올라 울고 물에 임하여 울다가 마침내 중이 되어서 부처님에게 귀의하던 오세암(五 歲庵) 밑으로, 또는 김삼연(金三淵)의 끼친 자취로 이름을 전하는 영시암(永矢庵)을 안고 돌아서, 그 산의 큰절인 백담 사(百潭寺)를 지나며 등, 칡, 댕댕이 덩굴을 뚫으며 바위 뿌 리를 감돌아서 구름과 안개의 맑고 거룩한 지역으로만 흐르 다가 티끌 세상의 첫걸음을 밟게 되는 데가 설악산의 첫 어 귀인 가평(加坪)이라는 동리였다.
그 동리의 북쪽으로 산기슭에 화전(火田) 비슷한 길찬 밭이 있는데, 누가 보든지 메마르게 보이는 밭이었다. 그 밭 중간 두둑의 한쪽 끝에서 김을 매고 있는 계집아이는 복(伏)지경 에 내리쬐는 볕을 가리기 위하여 조그마한 떨어진 수건에 물을 적셔서 머리 위에 얹었으나, 불 같은 햇볕과 김 같은 바람이 한 조각 수건에 전신 물기운의 서늘한 맛을 그 아이 에게 한 동안이라도 이바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 여 그 아이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 위의 수건을 몇 번이나 다듬거려서 고쳐 썼으나 그 수건은 마침내 뜨거운 볕을 가 려주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호미 잡았던 손으로 이마에서 흘러서 눈으로 들어가는 땀줄기를 씻었다. 그렇게 할 때마 다 손에 묻었던 흙이 땀에 배어서 눈으로 들어가서 눈알은 쓰라리고 쓰라리곤 하였다. 그리하면 날아간 수건을 줍거나 치마끈의 한 끝으로 눈도 씻고 땀도 씻곤 하였다. 아무리 지극히 공평되고 사정이 없는 태양으로, 찰 때는 차고 더울 때는 더워서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아이에 게는 너무도 애처로운 일이었다.
그 아이는 날마다 날마다 하루같이 혼자서 그 장차고 광찬 감자밭을 매는 것이었다. 약하고 연한 작은 손으로 손아귀 에 버는 육중한 호미를 잡고, 무딘 호미 끝으로 깊이 박힌 김뿌리를 캐고 돌덩이처럼 단단한 흙덩이를 깨뜨리려면, 그 호미를 몇 번 드놓지 아니하여도 팔목이 시고 손바닥이 아 팠다. 그러는 중에 한나절이 되며부터는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과 했볕의 반사로 땅에서 솟아오르는 더운 기운이 어리 고 연한 살을 녹일 만큼 찌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볕에 타 고 바람에 그은 어린 계집아이는 얼굴과 수족은 물론 몸까 지도 새까맣게 되어서 완연한 흑인종과 같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덥고 피곤할 때에는 설악산에서 내려오 는 시원한 물에 뛰어들어가서, 딩굴면서 목욕도 하고 먹기 도 하고 뱃속에 있는 창자까지라도 꺼내어 씻고도 싶었지 만, 밭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한참이 걸릴 뿐 아니라, 계집아 이니 만큼 혼자 가서 활활 벗고 멱감을 용기도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온몸을 벗고서 목욕까지는 하기가 어렵다 할지 라도, 잠시가서 낯도 씻고 손발도 씻고 마시기도 하여서 견 디기 어려운 더위를 적이 물리칠 수는 있었지마는, 그렇게 하노라면 자연히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시간을 허비한 결 과로는 밭을 덜 매게 되는 것이요, 밭을 덜 매게 되는 때에 는 그렇지 않아도 날마다 밭을 얼마 매지 못하였다고 집에 가서 날카로운 꾸지람을 듣는데, 게다가 물에 가서 몸을 씻 느라고 시간을 보내고 밭을 그전만큼도 못 매게 된다면, 그 때의 꾸지람을 어떻게 들을까 하는 어린 가슴속에 풀기 어 려운 두려운 마음이 뭉쳐져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멀지 아니한 곳에 은하수 같이 생각되는 시원한 물 을 두고도 비같이 흐르는 땀을 한번도 씻어 보지 못하는 것 이었다.
그 아이는 자기에게 있는 부드러운 마음과 약한 힘을 다하 여 심한 더위와 큰 괴로움을 참아 가면서 밭을 매다가 다시 배고픈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는 왼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는 밭둑에 있는 소나무의 그 림자를 돌아보았다. 그 소나무 그림자는 날마다 날마다 그 아이에게 점심 먹는 시각을 알려 주는 자연의 시계였다. 그 아이는 그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제보다 조금 더 동쪽으로 기울어 진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점심 먹을 때가 조금 지 난 것을 깨닫자 무슨 엄숙한 약속을 어긴 듯이 조금 놀랐다. 그 아이는 밭매기가 하도 어려워서 점심 때나 어서 되 었으면 하고, 해도 자주 쳐다보고 그 소나무 그림자도 참참 이 돌아보았다. 그리하여 오정때쯤 된다든지, 혹 그보다 조 금 지났다든지, 하여간 점심 먹고 쉴 때가 되었으면 마땅히 기뻐해야 할 터인데, 점심 먹을 시간이 어제보다 조금 늦어 진 것을 보고서 도리어 놀라게 되는 것은, 그 아이의 연약 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은, 사정 없이 내 리쬐는 폭양이나 숨이 탁탁 막히도록 울려치미는 땅 기운이 야 아랑곳할 바 아니었지만, 다시 말하면 그 아이의 기다리 던 점심때가 조금 지난 것을 보고서 도리어 놀라는 어이 없 는 심경을 하늘과 땅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아이에 게 점심 먹고 쉴 대를 가르쳐 주는 소나무 그림자도 그것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 아이가 점심 먹기 위하여 일어서려고 할 때에는 오래 쪼그리고 앉아서 김을 매기에 마비가 되어서 굳은 다리는 잘 펴지지 아니하였다. 그 아이가 아픈 것을 참아 가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조금 몸을 뒤틀어 가면서 다리를 차차 펼 때에는 무릎의 힘줄과 무릎의 뼈에서 오독오독하는 소리 가 난다. 그 아이는 일어서자 허리를 뒤로 젖히기도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며, 다리를 번갈아 들고 꼬부렸다 가 폈다 하여서 온 몸의 뼈와 힘줄을 고르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후! 하고 내쉬더니 에구!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누구를 원망한다든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든지 하는 등의 무엇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몸이 너무도 괴로워서 자연히 나 오는 소리였다.
그 아이는 밭고랑으로 나가면서도 행여나 감자순을 밟을까 봐 조심조심하여 밭둑으로 나가서 으레 점심 먹는 소나무 밑에 조그마한 반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반석에는 그늘 이 지고 조금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에는 점 심 꾸러미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그 아이는 빙긋이 웃었다. 그의 웃는 입술은 바로 아까 한숨쉬고 에고 소리를 지르던 그 입술이었다. 그 아이는 밥 꾸러미와 같이 달려 있는 조그마한 바가지를 떼어 가지고 여남은 걸음쯤 띄어 있는 조그마한 샘으로 갔다. 이것은 어느 사람이 일부 러 파 놓은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패어서 자연히 샘처럼 된 것인데, 그 물은 돌 틈에서 나오고 바닥에는 새 모래가 깔려서 물이 깨끗하고 차고 맛이 달았다. 그 아이는 가지고 간 바가지를 그 물에다 두 번이나 부시고 다시 한번 부시었다. 그리고 바가지를 가볍게 저어서 웃물을 헤치고 한가운 데로 퐁당 떠서 우선 벌떡 뻘떡 마시었다. 그 물을 마시는 아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누구보다도 자기가 제일 행 복스런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 아이는 물을 마신 뒤에 그 샘의 아랫물에다 손도 씻고, 얼굴도 씻었다. 그리고 발도 씻 으려다가 다시 밭을 매면 또 흙이 묻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 씻지는 아니 하고 다만 시원하게 하기 위하여 물에 들어 서서 혼뎅거리기만 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바가지에다 물 을 떠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조약돌 세 개를 솥발처럼 늘어 놓고, 그 위에다 물바가지를 기울어지지 않도록 반듯이 놓 았다. 그리고 점심 보자기를 내려서 깨끗한 돌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자기도 반석 위에 앉아서 점심 보자기를 끄르고, 마 악 먹으려고 할 때에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났다.
2.
그 아이는 몸을 조금 쉬고 점심을 먹으려다가 뜻밖에 뒤에 서 기침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나이가 오십 가량 되어 보이는 중늙은이 여자가 손에다 가방을 들 고 오는데 열인(閱人)을 많이 한 사람이 본다면 전도부인 비 슷도 하고 방물장수 같기도 하였다.
그 여자는 밭둑에서 얼마 안 되는 작은 길로 좇아오더니, 길로 가지 아니하고 그 아이있는 곳으로 향하여 오는데, 그 아이를 흘끔흘끔 보면서 빙긋빙긋 웃을 듯한 표정으로 치맛 자락이 산초나무 가시에 걸리는 줄도 모르고 바쁜 듯이 걸 어온다. 그 아이는 그 광경을 보고서 무슨 나쁜 짓이나 하 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펴놓았던 점심 보 자기를 부리나케 도로 덮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거동만 살 폈다.
"에구, 강원도가 산골이라는 말은 들었지마는 산골 중에도 이렇게 흉악한 산골이 어디 있을까? 거기 좀 들어오는데 치 마가 다 찢어졌나 보다."
하는 그 여자는 아직도 산초나무에 걸려 있는 치마폭의 한 자락을 떼어내다가 산초나무 가시에 손가락을 찔렸다.
"에구 아파! 금방 피가나네. 이게 무슨 천주악할 나뭇가시 가 이렇게 흉악하담."
하고 그는 가시에 찔린 손가락을 다른 손가락으로 꼭꼭 누 르고 비벼서 피가 나지 못하도록 하고서, 다시 그 손가락을 코 끝에 대고 콧김을 쐬면서 그 아이의 옆에 와 앉는다. 그 광경을 멋도 모르고 보는 아이의 놀랐던 가슴은 어느덧 안 정이 되고, 도리어 우스운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 여자를 흘끔흘끔 보았다.
그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찔린 손가락에 콧김을 쐬는 것 이 더욱 우스웠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고개를 돌려서 소리 안 나게 조금 웃고서는 그 여자의 하는 양을 보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점심 보자기를 다시 다듬거려서 그 여자가 보지 않는 편으로 비켜 놓았다.
"에구 아파! 아프다 못해 쓰리고나."
하고는 그 여자는 그 아이를 향하여
" 사람이 그냥 다니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산골에서 어 떻게 농사를 지어 먹고 사니. 더구나 이 뙤약볕에 밭을 어 떻게 매니. 그런데 네 집에는 농사짓는 다른 사람이 없니?
네가 밭을 매고 있게?"
하고 다시 그 아이에게로 다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아이 는 다시금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무어라고 대답을 하여야 좋을지 주저하였다.
"그래 늬 집은 어디냐?"
하고 다시 묻는 그 여자의 태도는 더욱 친절한 듯하였다.
"이 안 동리에요."
하고 그 아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 안 동리에? 네 나이는 몇 살이냐?"
"열네 살이에요."
"성은 무어구?"
"성은 장(張)가구, 이름은 순영(順英)이에요."
그 아이는 자기의 이름까지 말하였다. 그것은 어른이 성을 묻는데 아이로서 이름까지 대답하는 것이 예의라고 들었던 까닭이었다.
" 응, 그래. 장 순영이, 이름도 좋다. 나는 서울 사는 송씨 라는 사람이다."
하고 그 여자는 남의 거주 . 성명을 물었은즉 자기의 거주 . 성명도 말하는 것이 인사 . 체면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상 대한 사람이 어린 아이니만큼 자기의 이름까지는 말하지 아 니하고 동리 이름이라든지 번지까지는 아직 말할 것이 아니 라고 생각하여서 다만 서울 사는 송씨라고 한 것이었다.
" 그런데, 네 부모가 다 계시냐?"
하고 말을 계속하였다.
"아버지는 안계셔요."
순영은 슬픈 듯이 대답하였다.
" 그럼 어머니만 계시냐?"
" 어머니도 친어머니가 아니에요."
"친어머니가 아니면 무슨 어머니냐. 아마 서몬 게로구나."
하고 송씨는 걱정스런 듯이 말한다.
"서모는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어머니란 말이냐?"
"계모 어머니요."
하는 순영의 눈에는 실안개가 어리는 것 같았다.
"계모여! 그러니까 네가 밭을 매게 되었구나. 계모니까 그 렇지. 자고로 소설책을 보아도 계모 슬하에서 학대를 받는 일이 좀 많은가. 별별 기괴한 일이 다 많았지. 여북해야 어 린애가 이 뙤약볕에 밭을 매겠니. 그런데 오빠구 언니구 누 가 또 없니. 네 친동기간 말이야."
송씨는 여간 걱정스런 빛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빠두 언니두 아무두 없어요. 저 하나뿐이에요."
하는 순영은 갈수록 마음이 괴로워졌다.
"아무도 없고 너 혼자뿐이야? 그러면 무남독녀 외딸이로구나. 친부모가 계시면 옥이야 금이야 하고 얼마나 귀여워하 시겠니. 늬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은들 너를 두고 어떻 게 눈을 감으셨겠니 에구 가엽기도 하지."
하는 송씨의 말과 표정은 마치 자기의 친척이나 가까운 친 구의 딸에게 대하여 걱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순영은 부모를 여읜 뒤로 누구에게든지 그만큼 따뜻한 말 을 들어 본 적이 없어 본 적이 없었다. 자기의 주위에 닥치 는 것은 모두가 얼음처럼 차고 종이처럼 얇았다. 그리하여 세상이라는 것은 도무지 그러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있었으 나, 그러나 다른 집 아이들이 그의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을 볼 때에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이 불쌍한 듯하여서, 남모 르게 운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누구 하나 그 사정을 알아서 자기를 위로해주느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송씨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 빈 말이나마 그만큼 자기를 불쌍히 여 겨 주는 것에 견딜 수 없이 감격하였다. 게다가 자기의 부 모가 돌아가셨어도 자기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어린 가슴이라 하여도 미어질 듯하였다.
그리하여 고개를 돌리고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잠잠히 있던 순영에게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얘야, 너 우니, 울지마라. 어린 것이라도 소견이 있으니까 내 말을 듣고 우는구나,. 소견이 기특하다. 울지마라. 사람이 액운이 닫는 때는 그런 수가 있느니라. 너도 항상 그렇거니 와 액운이 다하고 잘 될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다. 옛날에 흥진비래요, 고진감래라구 부귀빈천은 물레바퀴 돌아가듯 하는 것이다. 조금도 스퍼하지 말아라. 네 얼굴이 예쁘고도 잘 생겼다. 멀지않아 액운이 다 하고 잘 될터이니 아예 울 지마라."
하는 송씨는 순영이 알아듣지도 못할 문자를 써서 말하고, 순영의 팔을 잡아서 가볍게 흔들면서 울지 말라고 말린다.
순영은 송씨가 울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을 보고서 처음에 는 더욱 울다가 차차 진정하고, 또는 송씨의 말을 다는 알 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대개가 자기가 장차 잘 되겠다고 위 로하는 말이, 작은 새의 그것과 같은 어린 순영의 마음은 거기에 솔깃하여서 다시 위안을 얻는 듯하였다.
순영은 별안간에 깜짝 놀라면서 나무 그늘을 보았다. 그것 은 정신 모르고 있는 자기의 발에 햇볕이 쬐어서 뜨거운 것 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순영이 날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점 심을 먹으려면 다 먹고 나서 한참 있어야 햇볕이 발에 내리 쬐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곧 일어나서 다시 밭을 매러 들어갔는데, 그날은 아직 점심도 먹지 아니하였는데 벌써 나무 그늘이 옮겼은즉, 늦었다고 장차 혹독한 꾸지람을 들 을 두려움이 있는 순영이로서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자기 집에서 넘어오는 고개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자기 집에서 누가 오다가 그 광경을 보지 아니하였 나 하는 염려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개뿐 아니라 어 디든지 거기서 보이는 곳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순영은 적 이 다행하였다. 순영은 옆에 있는 점심 싼 보자기를 만지작 거렸으나 차마 내놓고 먹지는 못하였다. 그 눈치를 본 송씨 는,
"얘, 너 참 밥먹어야지. 아까 오다가 보니까 너 밥먹으려고 하다가 내가 오니까 말았지. 점심 때가 늦어 간다. 이 때 까 지 밭 매고 여북이나 시장하겠니. 어서 내놓고 먹어라."
하고 앉은 자리에서 몸을 굽히고 찰을 늘여서 점심 꾸러미 를 잡아당겨서 순영이 앞에 놓는다.
순영은 시간도 늦어 가고 배도 고팠으므로 점심을 속히 먹 고도 싶었으나 어쩐지 점심 보자기를 풀고 싶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보자기의 여민 곳을 손으로 붙들고서,
"점심을 안 먹어도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숙인다.
"암 먹어도 괜찮다니, 이때까지 일을 하고서 배가 안 고풀 리가 있나. 내가 있으니까 체면 차리느라고 그러니? 어서 밥을 먹어라. 어디 밥은 무슨 밥이고 반찬은 무엇이냐. 구경 좀 하자."
하고 송씨는 점심 보자기를 끄른다. 순영은 할 수 없이 보 자기 잡았던 손을 놓으면서.
"밥이 아니에요."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송씨가 보자 기를 펴 놓고 보니 그 속에 있는 것은 찐 감자 몇 개하고 나무 잎새에다 소금 좀 싼 것 하고 그것뿐이었다.
"에구. 이것 감자뿐이로구나. 이것만 먹고서 어떻게 사니?
반찬이라고는 소금뿐이고, 에구 가엾기도 해라. 사람이 이걸 먹고서 사는구나. 그러나 이것이라도 어서 먹어라."
하고 송씨는 두 손으로 보자기의 양쪽 귀를 잡아서 행여 감자가 딩굴어 갈까 하고 조심스럽게 순영의 앞으로 다가놓 는다. 순영은 무슨 비밀이나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으나 그 렇다고 아니 먹을 수도 없었다.
" 그럼 먹겠어요."
하고 조슴 주저하는 순영은 감자 보자기를 조금 송씨의 앞 으로 밀어 놓으면서,
" 이거 하나 잡숴 보세요."
하고 송씨를 쳐다본다.
"오냐, 너나 어서 먹어라. 나는 점심밥을 많이 먹었다. 어 서 물 마시고 먹어라."
송씨는 정답게 말하였다.
"서울도 이런 것이 있어요?"
"있고말고. 지금은 서울이 시골보다 감자가 더 흔하단다."
"서울도 감자가 있어요!"
하고 순영은 이상한 듯이 눈을 깜짝거리다가 감자를 먹기 시작하였다. 순영이 감자에 소금을 찍어서 한 입씩 먹는데 별로 물도 많이 마시지 아니하고 잠깐 사이에 먹는다. 송씨 는 순영이 하도 먹음직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서 속으로 침 을 삼켜 가며 보다가 다 먹은뒤에
"너는 잘두 먹는다. 먹는 것이 아주 복스럽다. 사람이 그래 야지, 너는 암만 해도 복을 많이 받겠다."
순영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서 점심 보자기를 훌 훌 털어서 개어 놓고 나무 그림자 옮긴 것을 다시 보더니,
"저는 밭을 매러 가야겠어요."
하고 미안한 듯이 송씨를 보며 일어선다.
"응, 어서 매어라. 오늘 나 때문에 시간을 늦었구나. 너 밭 을 얼마 매지 못하였구나. 계모에게 걱정을 들으면 어쩌니.
내가 밭을 맬 줄 알면 같이 좀 매어 주겠지만, 나는 호미 자루가 어디가 붙은 줄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맬 수가 있나."
하고 송씨는 따라서 일어서더니 아까 산초나무에 걸렸던 치마폭을 살펴보고 다시 그 산초나무를 가리키면서,
"저게 무슨 나무가 저렇게 흉악하게 생겼니?"
하고 순영을 본다.
"그게 산초나무에요."
순영은 조금 웃으면서 말하였다.
"산초나무? 나무두 망하게두 생겼다. 허다한 나무에 어떻게 저따위로 생겼담. 하기야 사람두 그런 것이야. 너같이 얌전 한 사람은 나무로 일러두 좋은 꽃나무와 같은 것이고 사람 못된 것은 저 따위 나무와 같은 것이야. 남의 계모 노릇이 나 하면서 전처 자식에게 심하게 구는 것이 다 저렇게 가시 가 돋쳐서 남의 치마나 찢어 놓는 놈의 나무나 마찬가지지.
산초나무가 무슨 산초나무야. 개초나무라든지 돼지초나무라 든지 하지."
하고 송씨는 골을 내면서 흘기는 눈으로 산초나무를 본다.
순영은 송씨가 산초나무를 보고 성내고 욕하는 것이 여간 우습지 아니하였다. 돌아서서 소리 없이 웃다가 호미를 가 지고 밭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밭을 매었다. 송씨는 한참 이나 서서 순영의 밭 매는 것을 보다가 내일 이맘때 또 오 겠다고 하고서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어디론지 가버렸다.
3
이튿날 아침에는 설악산 중허리에서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 니 삽시간에 들과 마을을 덮는다. 순영은 언제든지 밭매러 가는 것이 싫었으나 그날 아침에는 어쩐지 속히 가고 싶었다. 순영은 어제 만났던 송씨의 일이 궁금하였던 까닭이었다. 순영은 머리도 빗고, 치마만이라도 빤 것으로 갈아 입고 싶었으나 그것은 계모가 무서워서 하지 못하였다.
순영은 아침에 낀 안개가 종일 그대로 있었으면 하였다.
그것은 내리쬐는 불볕이 너무도 무서운 까닭이었다. 그러 나 안개는 얼마 아니 되어서 슬슬 걷히기 시작하였다. 순영 이 밭매고 있는 그 곳을 스케지한다면 어제의 그것과 조금 도 다를 것이 없었으나. 다른 것이 있다면 동쪽 봉우리에 돌아가는 구름이 비 의사(意思)를 머금은 듯한 그것뿐이었다. 순영은 머리를 자주 돌이켜서 어제 송씨가 오던 길을 보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절이 거의 되도록 송씨는 오지 않 는다. 다만 백담사 길로 좇아나오는 늙은 중이 시내(川) 건 너의 작은 길로 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순영의 송씨를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였다. 그것은 순영이 송씨를 기다리는 까닭을 스스로 물어 본대도 꼭 집어서 대 답할 만한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순영이 점심 때를 표준하는 소나무 그늘은 거의거의 어제 그맘때가 되어 간다. 시내 위에 우뚝 선 바위 밑으로부터 처음에는 머리만 보이다가 차차 온몸을 나타내며 바쁜 듯이 오는 사람은 틀림없는 송씨였다. 그것을 본 순영은 달음질 로 좇아가서 마중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다만 일어서서 바 라보다가 도로 앉아서 못 본 체하고 밭을 매었다. 호미끝은 제자리에 가 찍히지 아니하고 딴 곳을 찍었다. 순영의 손은 호미에 있으나 순여의 마음은 송씨에게 있는 까닭이었다.
"에구, 너 또 와서 밭을 매는구나. 얼마나 더우냐. 나는 오 늘은 좀 일찍 와서 놀다 간다는 것이 다른 볼일이 있어서 좀 늦었다."
송씨는 밭고랑까지 들어서서 숨이 조금 찬 듯이 말을 한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는 이외에 순영은 다른 말을 더 할 것이 없었다. 말 대 답을 하기 위하여 일어서는 순영의 다리는 벌써 오금이 켕 기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제는 집에 가서 걱정이나 안 들었니?"
"아니요, 아시나요."
하는 순영의 말은 자기의 계모가 어제의 사정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점심 먹을 때가 아직 못 되었니?"
하고 송씨는 해를 쳐다본다.
"아직 조금 못 되었어요."
하고 순영은 해를 보지 아니하고 소나무 그림자를 돌아본다. "그래 오늘은 조금 일찍 나오너라. 내가 할 말도 있고 또 너 주려고 무엇을 좀 가지고 왔다."
하고는 송씨는 밭둑으로 나가서 반석에 가 앉는다.
순영은 아까는 별로 이유도 없이 송씨를 기다렸지마는 지 금은 정말 궁금하였다. 송씨가 자기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 니 할 말은 무슨 말이며, 또 무슨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이며 또 무슨 이유일까? 자기에게 무슨 좋 은 일이 있을 것인가?" 적지 아니한 기대큼 가지고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기쁜 생각도 있었으니, 여자로서 열네 살이 되었으면 부끄럼 많고 의심 많고 조심성 많은 처녀다운 지 경으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한쪽으로는 의심도 나 고 무서운 생각도 났으나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아침에 안개가 끼었으므로 낮에는 더욱 더울 줄로 안 것인데, 구름도 오락가락하고 바람도 불어서 어제보다는 조금 서늘한 편이었다. 순영은 밭맨 것을 돌아보았다. 한나 절 맨 것으로는 그전보다 훨씬 많이 매었다. 점심 참에 조 금 일기 나가서 늦게 들어온다 할지라도, 저녁 때에 조금 부지런히 서둘렀으면 전일보다 오히려 많이 매어질 것 같았다. 순영은 점심 때가 조금 못 된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나 갔다.
"자, 점심 먹기 전에 이것이나 좀 먹어 보아라."
하고 송씨는 신문지에 싼 꾸러미를 펴놓는데, 비스킷. 카스 텔라 그런 등의 과자였다. 순영은 그러한 과자를 먹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나. 흔히 먹지는 못한 것이요. 항상 감자나 강냉이로만 끼니를 잇고 별식이라곤 좀처럼 얻어 먹어 보지 못한 나머지라. 그것이 특별한 진미로 보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어서 먹어라. 네가 하두 얌전하고 밭 매느라고 너무도 애 를 쓰기에 일부러 이것을 사왔다. 어서 먹어라."
송씨는 과자를 보기만 하고 앉았는 순영에게 카스텔라를 접어서 주더니,
"물을 마시고 먹어야지. 내가 물을 떠 오마."
하고 얼른 일어서서 소나무에 걸린 종구라기를 떼어 가지 고 그 옆에 샘으로 가는데
"그만두세요, 제가 가겠어요."
하고 일어나서 종구라기를 빼앗으려고 하는 순영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자기 손으로 물을 EJ가지고 오는 송씨는 물 을 순영이 입에 대어 주다시피 마시라고 한다. 순영은 물을 감사히 받으면서도 너무 유난스럽게 권하는 바람에 행여 물 이 자기의 앞섶에 엎질러질까 염려하여 조심스레 물을 마시 고 과자를 먹기 시작하였다.
별안간 설악산 늘목형 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넘어 오고 샛바람이 건들건들 불기 시작하더니, 삽시작에 일기가 험악 하여 지면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거 비가 와서 큰일났구나. 어떻게하나."
하고 가방이니 수건이나 과자 봉지니 할 것 없이 주섬주섬 챙기며, 한편으로는 치마를 여미어서 깡뚱하게 추켜 매낸 둥 수선을 떠는 송씨는 여간 당황하지 않는다. 순영도 점심 그 릇이나 호미 같은 것을 급히 건사했으나 비교적 침착하 였다. 빛방울은 점점 자주 떨어진다. 동해 바다 쪽에서는 우 레 소리가 우르릉우르릉 나며 번개가 번쩍번쩍한다. 비는 쏟아지기 시작한다. 단 두 사람의 여자로서 무인지경에서 졸지에 그러한 광경을 당하여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면, 그 것도 인생 사회에 한 근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 나,
"이리 오세요."
하고 앞서 가면서 송씨를 인도하는 순영은 이러한 지경을 몇 번이나 당하여서 그다지 놀랄 것이 없다는 듯이 몸은 급 하였으나 마음은 침착하였다. 송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어서 무엇이든지 순영이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는 다른 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두 주먹을 부르쥐고 순영의 뒤만 쫓 아갔다. 얼마 아니 가서 바위 밑에 굴이 있다. 넉넉히 여남 은 사람은 앉을 만큼 되었다. 억수가 진대도 비는 한 방울 도 맞지 아니하게 되었다. 그 굴은 본래 조그마하게 생긴 것을 동리 사람들이 농사짓다가 그러한 경우에 비를 피하기 위하여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굴에 들어서자 마 자 순영은 이야기 하였다.
"에구 비두, 산골 비는 무지스럽고 흉악하게도 온다. 까딱 하면 떠내려 갈뻔 했다."
송씨는 젖은 옷을 떨고, 밖을 내다보면서 말하더니 다시 굴 속을 둘러 보며,
"에구, 방안 같구나. 사람이 자기라두 하겠네. 굴 속은 겨 울에는 덥고 여름에는 서늘하다는데. 참 한결 시원한 것 같 은데, 비를 맞아서 그런건가."
하고는 다시 굴 바닥에 놓여 있는 방석땍와 판판한 돌덩이 를 보더니
"에구, 사람들이 앉으려고 이런 것을 장만하여 놓았구나.
어디 좀 깔고 앉자. 너도 앉아라."
하고 그중 깨끗한 자리때기를 순영이에게 밀어 준다. 그리 고 무슨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빙글빙글 좋아한다. 순영도 송씨와 마주 앉았다. 비는 여전히 쏟아진다. 그들은 과자와 감자를 내어 놓고 산중 별미의 오찬회가 벌어졌다. 그러한 기회가 피로하고 가엾은 순영을 잠시라도 편안히 쉬게 하기 위하여 천사가 주는 기회인지. 순영의 앞길을 그르치기 위 하여 악마가 주는 기회인지, 혹은 사람으로서 간혹 있을 수 있는 공교한 일인진 모르나 하여간 이상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에구, 너는 어찌 그렇게 어여쁘냐. 어제 처음으로 볼 때에 는 이쁘긴 이뻐두 그다지 이쁜 줄은 몰랐는데, 오늘은 자세 히 보니까 정말 이쁘구나. 그 뙤양볕에 그을리고, 흙이 묻 고, 또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었어두 저렇게 어여쁠 때야, 잘 가꾸고 좋은 옷을 입으면 얼마나 이쁠까. 인물은 시골에 있다는 말이 옳은가봐. 서울 사람은 하도 가꾸니까 얼른 보 면 번지를르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맵자하게 이쁜 사람 이 드문데 너는 정말 미인이다. 저런 얼굴ㅇ르 가지고 이런 산골에 파묻혀 있기는 아깝지."
입에 침이 없이 순영을 칭찬하는 송씨는 다시 순영의 치마 를 만지면서,
"이게 네 집에서 난 것이냐?"
하고 순영을 본다.
"네."
하고 순영은 부끄러운 듯이 치마촉을 여미어서 오른편 발 끝으로 밟는다.
"네가 짠 것이냐?"
"아니에요. 저는 삼을 삼을 줄밖에 몰라요."
"그럼 네 계모가 짠 것이냐?"
"네."
"그럴 것이다. 네가 짰으면 얌전스럽게 잘 짰지 이렇게 못 되게 짰겠니. 나는 길쌈은 할 줄 모른다마는 이런 솜씨는 처음 구경하겠다. 굵든지 가늘든지 올이나 고르게 짜지 이 게 뭐람, 솜씨도 빌어먹겠다."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 석새 베라더니 참 석새 배로구나. 그 중에 또 성하기나 한다. 노닥 논닥 깁고 또 이렇게 해어져서 너풀너풀하는 것, 이런 것을 입어도 몸맵시가 어찌 그렇게 좋으냐. 어디 이렇 게 돌아앉아라. 뒤태를 좀 보자."
하고 순영을 억지로 돌려 앉히고 보더니,
"뒤태는 더 이쁘구나. 천상 타고 나는 것이라 할 수 없거든. 예다가 깨끗이 씻어서 비단옷이나 맵시 있게 입혀 노면 얼마나 이쁠까. 그러면 천상 선녀 같지 뭐야. 청산백옥이 건 토에 뭍힌 형국이라더니 너를 두고 이른 말이로구나."
하고 순영을 다시 돌려 앉히고서,
"되로 보니까 뒤가 더 이쁜 것 같더니, 앞으로 보니 또 앞 이 더 이쁜 것 같구나. 무산(巫山) 선녀가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로구나. 참 이 상도 해라."
하고 쉴 사이 없이 무당 푸념하듯이 순영을 추더니,
"너 비단옷 더러 입어 봤니?"
하고 화제를 돌린다.
"아니요, 못 입어 봤어요."
하는 순영은 다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인조견도 못 입어 보았어?"
"인조견 저고리는 하나 있어요. 그것은 명절 때나 나들이 갈 때나 입어요."
"그러면 비단신은 더구나 못 신어 보았겠구나."
"비단신이요?"
"그래."
"비단으로 신을 만드나요?"
"암, 비단으로 신을 만들고 말고, 이맘적에 개화들을 하여 서 고무신이니 무엇이니 모두 생겼지. 그 전에는 서울 사람 은 모두 비단신을 신었다."
"비단으로 신을 만들어 신으면 흙이 묻지 않아요? 그리고 비가 오면 젖구요?"
"흙이 묻으면 대순가. 그러니깐 그게 호사란 말이지. 비오 는 때는 신는 것은 진 신이 따로 있지."
"그래요, 비단으로 다 신을 만들어요? 지금도 비단신이 있 나요?"
하는 순영은 아무래도 비단으로 신을 지어 신는다는 말이 곧이 들리지 아니하였다.
"지금도 있고말고. 지금도 하이칼라들은 비단신을 신지. 그 러나 그전처럼 흔치는 아니하지."
하고 송씨는 다시 순영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더 니,
"너 비단신 좀 구경하고 싶으냐?"
하고 빙긋이 웃는다.
"어떻게 구경해요?"
순영은 그 말을 거짓말인가 하고 의심도 하였으나. 이상한 충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구경하려면 어렵지 않지."
하고 송씨는 자기의 가방을 열더니 신문지로 싼 것을 내놓 는다. 순영은 마음이 긴장되면서 그것을 바라본다. 송씨는 그것을 풀더니,
"자, 이것이 비단신이다. 구경 좀 하여라."
하고 조그마하고 어여쁘게 만든 비단신 한 켤레를 내놓는다. 그것은 빛은 회색이요 무늬는 준주 무늬로 된 것인데, 순영으로서 그 비단 이름을 알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에구 참. 비단신이군요. 척 이쁜데요."
순영은 그것을 만져 보려고 오른손을 내밀다가 깨끗지도 못한 자기 손에서 무엇이 묻을까 저어하여서 놀라는 듯이 손을 다시 움츠린다.
"만져 보고 싶으면 만져 보아라. 만져 보아도 괜찮다."
송씨는 신을 들어서 순영의 앞으로 나란히 놓는다. 순영은 아니 만져 보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듯이 신 한짝을 자기 치마폭의 가장 깨끗한데로 싸잡아 들고서, 자기가 잡았던 곳을 갸웃거려 가며 들여다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을 보고 서야 비로서 안심하였다.
"이렇게 고운 신을 어떻게 발에다 신고 땅으로 다녀요? 한 번만 신으면 다 더러울 텐데."
순영은 비단신이 좋아서 가지고 싶은 마음보다 그것이 너 무 고와서 신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앞을 선 것이다.
순영은 그 신발을 보다가 곁눈으로 자기의 발을 보았다.
눈대중으로 자기 발에 맞을 것도 같았다. 아무도 없으면 자 기 발을 깨끗이 씻고서 신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다 떨어져서 여기저기 얽어매고 흙투성이가 된 자기의 고무 신을 볼 때는 송씨가 부끄러운 것보다 비단신을 보기 가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순영은 자기의 신이 송씨에게 보 이지 않고 또 비단신에게 보이지 않도록 그 사이를 막아서 비켜 앉았다. 그리고 안 보는 체하면서 비단신을 자꾸자꾸 보았다.
"너 이런 신 신고 싶으냐?"
순영의 말엔 대답도 아니하고 순영의 거동만 살펴보는 송 씨는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아니에요, 신고 싶은 것이 뭐에요. 이런 신을 신고서 밭을 매면 어떻게 되겠어요."
순영은 어이가 없는 듯이 소리를 내어 웃는다.
"이런 신을 신고 밭을 매어서야 되겠니. 밭을 매지 아니하 도록 하고서 신어야지. 이런 신을 신으려면 규격에 맞게 하 고서 신어야지. 비단옷도 입고, 금가락지나 보석 반지도 끼 고 비단 양산도 가지고, 또 비단 가방도 가지고 또 쪽지면 순금 비녀에 보석 물린 연(蓮)봉 뒤꽂에도 꽂고, 모두 그렇 게 그렇게 하고서 선을 보라는 말이지. 그렇게 차리구 나서 면 얼마나 어여쁠까. 저 얼굴 저 맵시에."
하고는 송씨는 고래를 기울이고 순영의 얼굴을 본다.
"에구,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어요?"
순영은 솔깃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두 볼이 붉어 지면서 팔목으로 웃음 나오는 입을 가리었다.
"너라고 왜 못하니? 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 또 너같이 잘 생긴 사람이 그런 것을 못하고서 누가 하겠니. 네가 생각만 있으면 그렇게 하기는 여반장이다."
"어떻게요?"
"어떻게든지 되는 수가 있지."
"꿈에나 될까요."
"꿈에는 왜? 생시에 버젓하게 되지. 서울은 서울 토박이 보 다 시골서 호밋자루 놓고서 올라와서 잘된 사람이 더 많단다. 내가 알기에도 얼마인지 수가 없다. 너는 인물이 잘났으 니까 마음만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쉽고도 더 잘 될 것이다." 순영은 눈으로 비단신을 보고 귀로 송씨의 말을 듣기에 골 몰하였으나. 마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놀리는 듯이 굴 밖에 내다 보았다. 비는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 비단옷 한 벌도 못입어 보았다지? 비단 구경 좀 해 보 아라."
하는 송씨는 조그마한 꾸러미 하나를 내어서 순영이 앞에 펴놓는다. 그것은 가지각색의 비단 조각으로, 마치 조각보 만들려고 모아 두었던 것 같았다.
송씨는 준주사니, 여의사니, 법단이니, 양단이니, 하부다이 니 하고 주워 섬겼으나 순영으로서는 그 이름을 기억할 수 도 없었고, 또 다 기억하려고도 아니하였다. 다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지러운 꽃송이를 보는 것 같아서 정신이 황홀할 뿐이었다. 진홍빛이 고운가 하면 연분홍빛이 청초한 듯하고, 회색빛이 좋은가하면 남빛이 더 새뜻한 듯하였으며, 완자 무늬가 좋아 보이다가 다시 준주무늬가 좋아 보이며, 꽃무 늬가 혼란한 듯하다가 무늬 없는 것이 도리어 점잖게 보였다. 순영은 그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가지라면 어떤 것을 취하여야 할는지 모를 것이었다. 그 중에는 자기 동리의 호 사하는 사람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비단이 있는 듯도 하였 으나 그것도 분명히는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이런 비단이 다 나셨나요?
순영은 이러한 비단은 한두 조각도 얻기가 어려울 터인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생겼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우리 집에서 옷가지나 해 입을 때에 조각 남는 것을 모은 것이 그렇게 많단다."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솜씨가 좋을까요? 짜기도 잘 짜고 무색도 곱게 들이고, 저런 비단을 짜는 여자들은 예사 사람 들이 아니겠지요."
하는 순영은 옷감이나 무색을 들이는 것은 반드시 여자의 손으로만 하는 줄로 알았다. 자기는 석새 베를 짜는 것도 쉽지 아니하고, 또 옷감에 분홍이나 양청을 들이려면 얼룩 덜룩 하게 채(彩)가 지기 쉽고, 무색의 깊고 옅은 것도 마음 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 가는 비단에다 무늬를 놓아서 짜 며 또 어떻게 여러 가지 무색을 그렇게도 곱게 들어나 하는 생각이었다. 순영은 자기 동리에서는 얌전하다는 말도 듣고, 재주 있다는 말도 듣는다. 길쌈이라든지, 무새나 푸새 같은 것도 남보다 낮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도 그 렇다고 아는 터이었다. 그렇건마는 그러한 비단 짜는 솜씨 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말을 하면서, 비단 조 각들과 자기의 치마와를 갈마들어 보았다. 그러고 부끄러워 하였다.
"아니야, 이런 비단은 다 기계로 짜는 것이지. 사람의 손으 로 이렇게 짤 수가 있나. 그리고 무색도 다 기계로 들인단다. 서울에는 비단 짜는 데도 있고 염직소라고 물 들이는 데도 있고 다 있지. 서울에 가보면 별별 기기괴괴한 것이 다 있지. 없는 것이 있나. 고양이 뿔도 있고 색시 상투도 있 고 다 있지. 호호호."
"그래요, 이상도 해라. 무슨 기계가 저런 것을 다 짜는 기 계가 있을까요."
순영은 비단을 짜기도 기계로 짜고 물도 기계로 들인다는 말에 이상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였으나, 하여간 사람의 손으 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만일 그것이 다 여자의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재주가 그만 못할 것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는 생각이었다. "너 쓸 데 있으면 더러 가져가거라. 다라도 가져가거라. 내 게는 이런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깐."
하고 송씨는 비단 조각을 꾸러미째로 순영이 앞으로 밀어 놓는다.
순영은 비단 조각이 하도 커 보여서 그것을 그대로라도 두 고 이따금 내어 보기만 하여도 좋을 것 같았고, 또는 그런 것으로 색보를 모아서 색실이나 분갑 같은 것을 싸 두었으 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급기 야에 송씨가 가져가라고 주는 때에는 다시 생각이 났다. 그 것을 가지고 가는 때에는 자연히 계모가 알게 될 것인즉, 그것이 어디서 났느냐고 종주먹대게 되면 사실대로 말을 한 댔자 나쁜 일은 아닐 것이나 자연히 시끄렇게 될 것이요, 또는 무슨 뜻밖에 일이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어서 굳이 사양하고 말았다. 비는 아까 보다도 더 온다.
4.
송씨는 굴 어귀에 나셔서 비오는 것도 보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더니, 도로 와서 앉았던 자리를 비켜서 순영에게 가 까이 앉으면서 순영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한참 보더니,
"손금이 아주 좋구나. 부자 되고 호강하겠어. 그런데 초년 고생은 조금 있겠다. 이것 때문에 네가 지금 고생하는구나."
하고 손바닥 왼편에 있는 잔 금을 가리키더니 다시 오른편 에 있는 큰 금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부자 되고 호강할 금이다. 그런데 고생할 금은 가 늘고 짧고, 부자 될 금은 굵고 길지 아니하냐."
하고 다시 얼굴을 이리저리 자세히 보더니.
"네 상도 손금과 똑같다. 이마가 조금 좁은 까닭에 초년 고 생을 하는구나. 그런데 너는 집을 떠나야 할 팔자다. 집에만 묻혀 있으면 고생만 하고 별수 없겠다. 사람 이상이 아무리 좋아도 팔자에 타고난 대로 떠나게 되면 떠나고 있게 되면 있고 해야지, 떠나게 될 팔자를 억지로 있는다든지 있게 될 팔자를 억지로 떠난다든지 하면 못 쓰는 것이다. 너도 하루 바삐 집을 떠나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크게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순영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순영은 거기 대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속 히 집을 떠나지 않으면 좋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는 말에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속히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좋지 못한 일이 있어요?"
하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좋지 못한 일이 있지."
"무슨 좋지 못한 일이에요?"
"그것은 말할 수가 없다."
"집에 있으면 죽겠어요?"
"그거야 죽는 것만 똑 좋지 못한 일인가?"
"죽더라도 할 수 없지, 어떻게 떠날 수가 있나요."
하는 순영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나타난다. 순영의 기 색을 살펴보던 송씨는 순영의 말과는 조금 딴판으로,
"너 서울 구경 했니?"
하고 묻는다.
"서울 구경이 뭐에요. 십리 밖에도 못 나가 보았는데요."
"이때까지 십리 밖을 구경하지 못했어?"
"네."
"그러니까 네게 고생이 더 되지. 팔자는 나다닐 팔잔데 십 리 밖에도 안 나가고 있으니 되겠니? 나하고 서울이나 가자." 하고 다시 순영의 기색을 살핀다.
"제가 어떻게 서울엘 가요?"
순영은 돌연히 서울 가자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네가 갈 생각만 있으면 가는 수가 있지. 나도 네가 장래 잘 될 상(相)이기에 가자고 하는 것이다. 너는 집을 떠 나더라도 서울 같은 대처로 가야지 다른 곳으로 가서는 소 용이 없을 것이다."
하고 끝말을 꽉 눌렀다.
바람이 불지 아니하여도 흔들릴 만큼 연약한 순영의 작은 가슴은 여간 설레지 아니하였다. 거기 대하여 가타 부타 말 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마음으로도 어떻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가 서울엘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비단옷도 입 을 수가 있고 비단신도 신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나 그뿐 인가, 좋은 데로 시집을 가서 쪽지게 되면 보석 반지에 순 금 비녀에, 어디를 가려면 자동차를 타고 마음대로 호강을 할 터인데 말할 것이 무엇 잇나. 그게 다 네 복으로 그렇게 된단말이야, 내가 억지로 시켜 준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 네 덕에 나도 호강을 하자꾸나."
송씨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웃음으로 끝을 막는다. 순영도 웃었다. 그러나 순영은 송씨의얼굴을 똑바로 보지 아니하고 조금 외면하였다.
"그런데 대관절 네 생각이 어떠냐? 갈 생각이 있으면 내가 잘 데리고 가는 것이고, 안 간다면 할 수 없고, 그러나 네가 아무 때 가도 가기는 갈 것이다. 사람이 팔자는 속이지 못 하는 것이니까."
송씨는 결정있는 대답을 다그쳐 묻는다. 순영은 아직 모르 겠다고 가타 부타 결정하는 대답을 피하였다. 그들의 말이 끝나자 비도 따라서 그쳤다.
5.
순영은 평일에 밭으로부터 돌아가는 때는 언제든지 늦게 되 었다. 그리하여 집에 가면 곧 저녁을 먹게 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밥도 내릴 사이 없이 곧 쓰러져서 자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나긴 여름날의 피 곤한 몸을 짧은 밤에 꿈도 없는 단잠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어서 밭을 맬 수가 없 으므로 조금 일찍이 돌아왔으나, 그 대신에 집안 쓰레질도 하고 저녁밥도 지어 먹고 하느라고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잠자리에 누워 있는 순영은 눈이 반반한 채로 잠이 오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송씨의 일이 생각나는 동시 에 자기의 지나간 모든 일이 역력히 생각되었다.
순영은 산촌의 구천 집에서 자라났으나 그다지 무지막지한 가정에서 본 데 없이 생장한 것은 아니었다. 순영의 아버지 는 한문학자였다. 그러므로 촌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고 그 사례로 전곡(錢穀)간에 얼마씩 거두어 주는 것으로 생활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순영도
<천자(千字)> , <동몽선습(童蒙先習)> , <격몽요결(擊蒙要 訣)>까지 배웠고, 항상 훈계하는 말이라도 오륜(五倫)이니, 삼강(三綱)이니 하는 이외에 특별히 여자의 행실에 대한 말 을 많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순영은 천품이 순량하고 의지 가 굳은 편이었다. 그리고 얼굴도 그다지 미인은 아니나 누 구라도 귀엽게 볼만큼 되었다. 그리고 하는 행동도 요사바 사하다든지 간교하다든지 그러한 일이 없고 순직하여서, 동 리 사람에게도 칭찬을 듣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순영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일곱 살때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 고 계모를 얻는 바에, 사람이 아주 재깔마리인데다가 시기 가 많아서 자기가 데리고 들어온 딸보다도 순영이 나은 것 을 미워하였다. 그리하던가 순영의 아버지가 돌아간 뒤부터 는 거칠 데 없이 순영을 구박하였다.
순영의 집은 본래 가난하여서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었지마는, 그 중에도 순영은 있는 음식에도 배부르게 얻 어 먹지 못하고, 있는 의복에도 등 따습게 입어 보지를 못 하였다. 언제든지 약한 힘으로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칭찬 이라고는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하고 도리어 꾸지람만 듣게 되며, 때때로 잘못한 일 엇이 혹독한 매를 맞게 되어서 집 안은 가시 덤불 같고, 인정은 얼음 같았다. 아무리 자기의 나이보다 많이 참고 자기의 키보다 더 길게 견디는 순영으 로도, 도저히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피로를 견딜 수가 없었 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영은 한 마디의 따뜻한 말이라도 배 고플 때의 밥보다도 고맙고, 조그마한 친절한 일이라도 추 울 때의 옷보다도 그리웠다. 그리하여 더위를 무릅쓰고 땀 을 뻘뻘 흘려가며 어려운 일을 할 때에 누구라도,
"에구, 너 덥겠구나."
한다든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서 홑치마에 맨발을 벗고 서 동동걸음 칠 때에,
"에구, 추워서 어쩌나."
한다든지 하면, 그러한 말만이라도 자기에게 새로운 생명 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쓸한 세상을 보내다가 우연히 송씨를 만나서 자 기에게 말로만이라도 고맙게 구는 것이 그지없이 감사하였 는데, 게다가 자기를 구원까지 하여 주겠다는 것은 무어라 고 말 할 수가 없이 감사하였다. 또 자기의 팔자가 잘 되겠 다는 점에 대해서는 꼭 믿어지지도 아니하였으나 그렇다고 전연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차차 생각할수록 그것을 믿어지지 아니하는 마음이 삼분이라면 그것을 바라 고 믿어지는 생각이 칠분이나 되었다. 그러한 잘 된다든지 못 된다든지 하는 미래의 일보다, 우선 꽃무늬 있는 비단옷 을 입고 또한 그러한 비단신을 신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자기가 그렇게 차리고 나선다면 보는 사람들이 자기를 얼마 나 귀여워할 것인가. 또는 자기가 며칠이라도 몸을 가꾼 뒤 에 얼굴에 분이나 바르고 머리를 곱게 빗고 그러한 비단옷 을 입는다면 자기 스스로 거울을 본대도 그다지 남만 못지 아니할 것 같았다. 그렇게 차린 자기가 곧 깜깜한 벽에 비 치는 것 같았다.
순영은 생각을 계속 하였다. 우선 서울 가서 잘 지내다가 차차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서, 남편도 잘 만나고 호강을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집에 있다가는 언제까지든지 지금과 같은 고생을 계속할 것이요, 나중에 시집을 간대야 역시 구차한 집으로 갈 것이요, 남편 될 사람이라야 땔나무꾼에 지나지 못할 것인즉, 그리하느라 면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말 것이요, 호화로운 구석이라고 는 조금도 없을 터인즉, 그것을 비교하여 생각하면 당장이 라도 뛰어 나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할 때에는, 가기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자기가 동리 집에 마을만 가도, 여자라는 것은 함부로 나다 니는 것이 아니라는 꾸지람을 들을 때에 여러 가지로 여자 의 행실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자기가 아무도 몰래 서울까지 간다면 그것을 잘못하는 일이 아닐까? 또는 송씨 라는 이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를 따라갔다가 일이 여의 치 못하면 어찌 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때에는 거기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요, 집으로 도로 올 수도 없는 일인즉 오도가도 못하고 어찌될 것인가?
순영은 여러 가지의 공상으로 미래의 운명을 그려보았다.
행복의 꽃도 그려보고 불행의 잎새도 그려보았으나 다만 진정한 열매만을 그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의 공상은 홀연히 광명을 얻어서 앞길이 탄탄한 대로로 환하게 보이다 가 어느덧 침침칠야가 되어서 물러갈 길조차 없어지고, 조 금 있다가는 또 그러한 현상이 뒤집히곤 하였다.
이렇게 공상이 사로잡힌 순영은 아무리 하여도 잠을 잘 수 는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불도 켜고 싶고 일어앉고도 싶 고, 마음대로 돌아눕기도 하고, 기침도 나오는 대로 하고 싶 었으나 그것을 마음대로 못하였다. 그것은 옆에 누워 자는 계모가 자기의 잠 안 자는 것을 안다면 무슨 야단이 날는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 려고 하였지마는 잠을 들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조금도 움직 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요, 게다가 빈대로 물고 모기도 물고 하여서 가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만 오래 누워서 몸이 불편하기도 하였으므로, 주의를 하면 주의를 할수록 움직이 지 아니하면 견딜 수가 없는 일이 생기었다.
"왜 잠을 아니 자고 버스럭거려쌓니?"
하는 계모의 소리는 바늘로 찌르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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