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3

윤동주 -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담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 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정보 2023.02.22

윤동주 - 흰 그림자

흰 그림자 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 보낸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黃昏처럼 물드는 내방으로 돌아오면 信念이 깊은 으젓한 羊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一九四二•四•一四

정보 2023.02.22

윤동주 -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

정보 2023.02.22